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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창조적 엉터리 기질’ 있어… 풀어주면 오히려 더 잘해”

에듀스킬

by 스터디스킬 2022. 6. 24.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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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과학자’ 최재천(68)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요즘 유튜브에서 잘 나가는 스타다. 그가 운영하는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은 개설 1년 8개월 만에 구독자 33만5000명을 돌파했다.
동물학과 생태학을 전공한 자연과학계 석학이자 한 해 수천 회 섭외 요청을 받는 ‘강연계 아이돌’인 최 교수에게 유튜브 인플루언서라는 수식어가 추가된 것이다.
그는 유튜브에서 식량 위기와 팬데믹, 세대 갈등과 저출산 등 여러 이슈를 짚으며 더 나은 세상을 가꾸지 못한 기성세대의 미안함을 전한다.
오랜 세월 쌓은 생태학적 지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지혜도 잊지 않는다. 학자에게 마이크를 끼고 대중과 만나는 유튜브는 어떤 의미일까.
최 교수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쪼개 매주 한 차례 영상을 올리는 그는 최근엔 교육에 관한 고민을 담은 ‘최재천의 공부’(김영사)를 출간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려면 개성을 죽이는 교육 정책에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유튜브로, 교육으로 보폭을 넓혀도 그의 통찰은 결국 자연과 생태로 귀결된다.
지난달 20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SNS 인플루언서와의 대화는 유튜브에서 시작했다.

―유튜브는 어떻게 하게 됐나.

“노골적이고 솔직한 답변은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거다. 2013년부터 제인 구달 박사와 ‘생명다양성재단’이라는 공익재단을 운영 중인데, 직원들 월급 주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직원들이 떠나는 상황이 반복되자 누군가 ‘유튜브로 재단 운영비를 마련해보라’고 조언했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구독자가 느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1년이 지나도록 구독자가 1만 명도 안 됐다.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주 촬영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제작팀이 불안해했다더라. ‘성과도 시원찮은데 그만하자’고 얘기하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원래 무슨 일을 시작하면 ‘얼마나 잘 되느냐’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던한 성격 덕분에 개미 연구에 40년, 까치 연구에 25년, 긴팔원숭이 연구에 15년을 바칠 수 있었다.”

고만고만하던 채널이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탄 건 지난해 11월 저출산의 원인과 해법에 관한 영상을 공개하면서다. 최 교수는 이 영상에서 “대한민국에서 애 낳는 사람은 바보다. 진화생물학자 입장에서 저출산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진화적 적응”이라는 도발적 주장을 내놓았다. “주변에 먹을 게 없고, 숨을 곳이 없는데 새끼를 마구 낳는 개체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상황이 좋아지면 (애를) 낳지 말라고 해도 낳는다”며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아이들이 자랄 때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젊은 세대의 공감을 산 영상은 현재 조회 수 173만 회를 넘겼고, 급증한 채널 구독자 덕분에 이전 콘텐츠까지 역주행하고 있다.

―첫 회에서 ‘과학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과학화’에 힘쓰겠다고 했는데.

“과학은 참 묘한 운명을 지닌 분야다. 현대사회에서 과학 없이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여전히 과학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정치인들이나 예산권을 가진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중요성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투자와 지원이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른바 ‘과학의 대중화’는 학문 자체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언젠가 ‘대중화’를 한답시고 ‘물’을 너무 타면 과학은 쏙 빠지고 분위기만 남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정말 필요한 건 ‘대중의 과학화’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은 ‘떼쓰면 통하는 나라’인데, 더 많은 대중이 ‘과학적 마인드’를 갖추면 사회도 그만큼 합리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대중의 과학화는 과학의 중요성 전파뿐 아니라 민주주의 확립에도 도움이 된다.”

최 교수는 유튜브 출연이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칼럼 쓰기나 강연을 통한 소통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후 칼럼이든 강연이든 일정이 허락하는 한 기쁜 마음으로 섭외 요청에 응했다. 그걸 보고 한 선배 교수가 ‘하버드대 박사 출신이어서 데려왔더니 연예인인 줄 안다’고 험담을 하더라.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싶어 멈추지 않았다. 유튜브 출연도 그 연장선이기에 불편하거나 새로운 느낌은 전혀 없다. 학자라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 읽고 글만 쓰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지난 5월 출간된 ‘최재천의 공부’는 대중과의 접점을 ‘과학’에서 ‘교육’으로 넓히는 시도다.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과 나눈 대담을 엮은 책에서 최 교수는 작심하고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찾아주자고 절절히 호소하는 책은 출간 한 달 반만에 5만 부 이상 팔릴 정도로 폭발적 관심을 얻고 있다. ‘서울대 학사-하버드대 박사’라는 간판이 말해주듯 최 교수는 모두가 알아주는 ‘공부의 도사’지만, 오랜 세월 그에게도 공부는 ‘어머니 잔소리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공부에 흥미를 느낀 건 유학을 떠나면서다.

“산으로 들로 동물을 찾아다니고, 연구한 내용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은 한국식 기준에 의하면 공부가 아니었다. 그냥 너무 재밌어서 놀았다. 공부를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달라진 거다. 가끔 초등학생들이 직접 잡은 벌레를 보여주겠다고 연구실에 찾아온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 연락이 끊긴다. 놀이가 공부에 밀린 거다. ‘최재천의 공부’는 공부가 놀이가 되는 순간을 꿈꾸며 쓴 책이다. 내 마음속 제목이 ‘최재천의 공부’가 아닌 ‘최재천의 놀이’인 이유다.”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어린이집과 유치원까지 20년 이상을 공부에 쏟아붓는다. 인생의 첫 5분의 1을 다가올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게 맞는가. 한국의 청년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높은 건 희생의 과정에서 지쳐버린 젊은이가 많기 때문이다. ‘살자고 하는 공부’인데 ‘죽자고 하는 공부’가 돼버렸다.”

 최 교수는 책에서 부모들과 함께 촛불집회를 기획하고 싶다는 꿈을 내비친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아이들을 입시학원에 보내지 맙시다”고 선창하면 부모들이 함께 촛불을 치켜드는 집회 말이다. 최 교수는 이 시대 모든 엄마 아빠들을 향해 묻는다. “솔직히 내 아이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잖아요? 옆집이 안 보내면 나도 안 보내고 싶잖아요? 이 어처구니없는 쳇바퀴에서 모두가 하나, 둘, 셋 하며 함께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학벌 사회인 한국 현실을 고려하면 이상적인 주장으로 들린다.

“그렇지 않다. 학벌과 성공이 직결되지 않는 사례가 늘면 인식도 바뀔 거다. 미국에서 제일 성공한 사업가인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는 모두 하버드대를 중퇴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하버드대에 가보면 ‘언제 학교를 때려치울지’를 놓고 얘기 나누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성실히 졸업하면 빌 게이츠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해야 하지만, 때려치우면 빌 게이츠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거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나왔다고 인생이 보장되는 공식은 이미 무너졌다.”

―중장기 교육정책 설계를 위한 국가교육위원회가 21일 출범한다. 시급히 논의해야 할 사안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60대 후반인 내가 반세기 전에 받은 교육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지금의 학생들도 그대로 받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에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게 얼마나 될까. ‘최소기본교육소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기본적으로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게 뭔지 논의했으면 한다. 가능한 한 ‘학습 범위’를 줄여 학생들이 공부 이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다. 마치 피겨 스케이팅 선수처럼 엉덩방아를 찧지 않으려고 밤샘 훈련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 평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한국은 교육으로 흥했지만, 과감한 결단이 없으면 교육으로 망하는 순간이 분명 온다. 한국인들은 ‘엉터리 기질’이 있어서 풀어주면 오히려 더 잘한다.”

―엉터리 기질이 뭔가.

“내가 만든 말이다.(웃음) 한국인들은 ‘매뉴얼을 안 읽는 국민’이다. 가전제품 하나 조립할 때도 깨알 같은 설명서를 꼼꼼히 보는 미국인들과는 참 다르다. 우리는 일단 플러그에 꽂아보고 ‘퍽’ 하고 터지면 그제야 매뉴얼을 찾지 않나. 그런데 이런 임기응변식의 엉터리 기질이 창조적인 결과를 낳는다. 최근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예술적 개성을 존중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이지 않나. 자유로운 성장 과정이 있었기에 ‘상 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피아노 치는 게 좋다’는 어록이 나오는 것이다. 학교가 아닌 아버지에게서 축구를 배운 손흥민도 제도적 굴레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덕분에 훨훨 날아다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손흥민과 임윤찬처럼 끼 넘치는 예술·체육인을 보유한 나라다. 이제는 똑같은 교육으로 똑같은 사람을 양산하는 방식을 그만둘 때가 됐다.”

 최 교수는 한국 교육이 신경 써야 할 또 하나의 과제로 ‘토론’을 지목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은 재능이 많은 민족이지만, 마주 앉아 대화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엔 유독 취약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국에서 익힌 토론식 수업을 진행했으나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토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최재천의 공부’ 후속작으로 준비 중인 책도 토론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가제는 ‘숙론’으로 정해놓았다.

―토론과 숙론의 차이가 뭔가.

“토론의 ‘토(討)’는 ‘두들기고 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이 토론하는 걸 보면 그야말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게 목적인 것 같다. 싸움에서 이기려는 토론과 달리 숙론은 깊은 고민과 사유를 나누며 제3의 묘안을 찾는 바탕이 된다. 끝까지 파고드는 숙론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내 수업은 텅텅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재천 수업을 들으려다 정원이 꽉 차 못 들었다’는 건 이화여대 3대 거짓말 중 하나다.(웃음) 어릴 때부터 토론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 뒷받침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최 교수는 팬데믹을 기점으로 초·중등 교육에 환경 과목을 포함하자고 제안했다. “국·영·수만 열심히 배우다 바이러스에 걸려 죽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민관합동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지난해 출간한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김영사)를 통해 팬데믹 시대의 교육정책부터 생태적 전환에 관한 사유를 펼쳐놓았다. 최 교수가 규정하는 팬데믹은 “인간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경제 제일 정책이 불러온 대재앙”이다.

―코로나19로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잃은 것이야 어디 한두 가지겠나. 목숨을 잃은 분들, 생계가 파탄 난 자영업자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이분들을 생각하면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사회 전체 수준에선 얻은 게 많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함께 사는 세상’이 그저 정치인들의 립 서비스가 아니라 힘 모아 구현해야 하는 목표라는 것을 절감했다. 음식을 배달하는 청년이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워야 나도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2년 넘게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집단주의 사회가 아니라 이타적 이기주의에 기반한 성숙한 개인주의 사회로 발돋움했다. 우리는 ‘내가 협조해야 방역이 완성된다’는 집단적 현명함으로 서로를 지켜냈다. 한 설문조사에서 ‘왜 마스크를 성실히 쓰느냐’는 질문에 60% 이상이 ‘남한테 바이러스를 옮기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답변한 것을 보고 놀랐다. 이에 반해 선진국이라고 우러러봤던 미국의 일부 시민은 정부 이동제한 조치에 반발해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나. 한국인의 민도(民度)는 웬만한 선진국의 민도보다 훨씬 우수하다.”

최 교수는 코로나19 백신 개발 이후 백신을 맞는 순서를 사회적으로 합의한 것 역시 인류 역사의 진보를 입증하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 사례를 찾기 위해 열심히 문헌을 뒤지는 중”이라며 “확신하건대 이전엔 힘 있는 자와 가진 자가 백신을 먼저 맞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어 “팬데믹 시기 양로원에 계시는 어르신들, 환자를 상대하는 의료진을 ‘우선 순위 접종자’로 분류하는 데 누구도 반발하지 않은 건 ‘우리가 함께 얽혀 있는 존재’라는 인식 덕분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유튜브에서 ‘팬데믹이 끝나도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렇다. 코로나19 대유행은 갑자기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에서 빚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병 발생 주기가 몇 년 간격으로 짧아지면 이번처럼 운 좋게 빠른 시일 안에 훌륭한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게 ‘행동 백신(behavior vaccine)’과 ‘생태 백신(eco-vaccine)’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행동 백신은 손 씻기,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우리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준수한 방역 수칙이다. 행동 백신이 일상 속 작은 실천이라면, 생태 백신은 삶의 근본적 전환을 요청하는 개념이다. 최 교수는 “생태 백신을 접종한다는 것은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뜻”이라며 “자연과도 적절한 거리를 두자는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러스가 애당초 우리에게 건너오지 못하도록 야생동물을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박쥐와 낙타, 천산갑이 먼저 우리에게 악수를 청할 리 없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때로는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사실 생태 백신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제인 구달과 (하버드대 지도 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 등 수많은 대가가 ‘자연을 보호하는 게 더 이롭다’고 줄기차게 호소해왔다. 귀가 아프도록 듣던 구호를 생태 백신으로 ‘개명’했을 뿐이다.”

 최 교수는 올해 4월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네치아비엔날레 기조 강연에서도 생태 백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옛날 유럽의 페스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부흥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예술가들이 생태 백신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면 조금은 더 멋진 세상을 만나지 않을까’라는 초대 글에 감읍해 1초의 고민도 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내로라하는 미술계 거장들과 교류하며 가슴 벅찬 경험을 했다”고 돌이켰다.

―어떤 점이 가슴 벅찼나.

“과학자들의 영향력이라는 건 뻔하다. 언젠가 윌슨 교수가 ‘개미 언덕’이라는 소설을 출간했길래 ‘왜 갑자기 문학 작품을 썼냐’고 물었다. 답변은 이랬다. ‘너나 나나 아무리 과학 논문을 기가 막히게 써본들 ‘우리 동네’ 사람들 몇십 명이 읽으면 끝이잖아. 그런데 그림 한 점, 시 한 편은 수천 만 명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만든 건 아니지만, 베네치아에서 만난 미술 작가들이 에코 백신 개념으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해줄 때 분야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감흥을 느꼈다. 제법 떠먹기 쉽게 개념을 만든 것 같아 뿌듯했다.(웃음)”

 에코 백신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최 교수가 20년 전 제안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개념이 떠올랐다. 호모 심비우스는 공생을 뜻하는 ‘symbiosis’에서 착안한 학명으로 다른 생명과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엔 현명한 인류라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대한 반발이 담겼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심비우스가 되면 팬데믹을, 기후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인류가 똑똑하고 독창적일지는 몰라도 결코 현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했다면 팬데믹부터 기후위기까지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동물이기에 이번 세기 안에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을 접고 자연과 공생하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MB 4대강 비판하다 고초… 朴정부 때 초대 국립생태원장

■ 최재천 석좌교수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어쩌다’ 자연과학자가 됐다. 서울대 의예과에 지망했으나 낙방하고 재수를 해 2지망으로 쓴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했다. “과학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최 교수는 인문적 재능을 발휘할 여지가 있는 동물생태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덕분에 이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믿는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현대의 찰스 다윈’ 에드워드 윌슨 교수를 만난 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지난해 별세한 윌슨 교수는 인간부터 곤충에 이르는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회생물학을 주창한 학자다. 최 교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놓인 장벽을 꼬집는 윌슨의 저서 ‘Consilience’를 ‘통섭’이라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며 융합 열풍을 이끌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책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을 비롯해 50여 편의 글을 실은 에세이로 누적 판매 부수가 20만 부에 달한다. 올해 6월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에 맞춰 20주년 개정판이 출간됐다.

 사회 참여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5년 호주제 폐지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최 교수는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생물학적 족보는 여성 혈통만 기록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호주제에 숨은 부계 혈통주의의 모순을 꼬집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을 비판하다 계좌추적과 세무조사 등에 시달리기도 했던 그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초대 국립생태원장으로 부임했다.

△1977년 서울대 동물학 학사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생태학 석사 △1990년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 박사 △1994∼2006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2006년∼현재 이화여대 석좌교수 △2013년∼현재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2013∼2016년 제1대 국립생태원장 △ ‘통섭의 식탁’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 ‘최재천의 공부’ 등 출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딴짓”… 궁극의 연구 대상은 “인간”

■ 최재천 교수의 삶과 철학


◇딴짓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조각에 빠져 미대에 갈 꿈을 품은 적이 있다. 민벌레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쓸 때 최적의 서식 환경을 위해 ‘석고로 된 실험 용기’를 고안한 건 조각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아홉 살 때부터는 글쟁이가 되고 싶어 시를 쓰기도 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다 이제는 아예 ‘생명의 속을 헤집으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생물학만 팠으면 평범한 곤충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독서 =“코끼리 똥을 만드는 자양분이다. 독서 강연을 할 때마다 코끼리가 똥 누는 사진을 화면에 띄운다. 코끼리 똥은 양이 엄청나다.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오는 법이다. 독서를 안 하는데도 글을 제법 쓴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많이 읽은 사람이 결국 잘 쓴다. 읽은 내용을 기억해서 베끼는 게 아니라, 읽으며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문장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도 읽어야 할 책들을 제대로 안내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은 너무 교과서 중심이다.”

◇강연 =“한해 5000∼6000건의 섭외 요청을 받는다. 하루 날 잡고 한 시간 넘게 ‘고사의 변(辯)’을 구구절절 써보내는 경우도 많다. 한동안 다른 이에게 강연 일정 관리를 맡겼다 ‘거만해졌다’는 얘기를 듣고는 줄곧 직접 하고 있다. 거절은 언제나 어렵지만, 강연은 독자와 눈빛으로 교감하는 귀한 기회라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응하려 한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정계 입문 직후 한 인터뷰에서 ‘1년에 3000건 정도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고 말한 것을 듣고 ‘얼마 안 되네’라고 생각했다.(웃음)”

 

◇궁극의 연구대상 =“인간이다.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의 모습에서 인간을 보는 인문학자이고 싶다. 오랜 세월 개미를 연구한 이유 역시 개미가 인간과 가장 닮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세우고, 농사를 짓고, 전쟁을 감행하는 ‘인간적인 일들’이 개미 사회에서도 늘 벌어진다. 인간 본성의 기원은 동물 속에 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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